역사 속 여성과 약학
역사 속에는 예로부터 보건과 약학의 상징에는 항상 여성이 있었다. 파나시아(Panacea) 고대 그리스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Asclepius)-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의학과 치료의 신과 에피오네 (Epione, 비슷하지만 마이너한 치료의 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substance curing all diseases - 만병통치약의 의미를 담은 이름을 가진 여신이다. Panacea의 자매로는 히기에이아(Hygieia)가 있으며 약국 표시에 종종 쓰이는 로고 - Bowl of Hygieia (뱀과 와인잔 형상)의 주인으로, 보건과 섭생, 건강을 위한 환경 조절의 지혜의 신이다. 처음에는 히기에이아가 더 높이 숭배되었으나, 질병에 걸린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지면서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한 숭배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참고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은 우리가 흔히 아는 (세계보건기구 로고 중앙에 있는) 지팡이와 뱀이다.
15세기 중세시대를 거처 16세기 르네상스의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흥운동에서 내려온 전통 여성상을 이어서인지, 중세시대에도 여성은 아래 그림과 같이 집안에서 허브를 이용한 치료 및 보살핌을 하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시장에서 허브를 파는 그림에는 거진 항상 여자가 그려져 있는데, 각종 민간요법에 대한 조언제공 및 천연 재료를 이용한 간단한 치료를 행하였다.
17-19세기에는, Kent 백작부인의 작품인 "Countess of Kent's powder "라는 치료제가 인기였다. 영국 사회 내 대대적으로 팔리고 유통된 이 Countess of Kent's powder는 오만가지 재료가 들어가 있는, 치료로 쓰이는 분말가루이다. '무엇이든 치료하는 약'으로 알려진 이 가루는 80년대까지 제조되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재료에는, 진주의 마법, 게의 눈, 흰색 호박,하트숀, 흰 산호의 마법, Lapis contra Parvam, 게 발톱의 검은 가루, 오리엔탈 베자르(향신료)가 있다. 현재로 예상하자면 질병의 치료제가 아닌 자양강장제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다.
17세기는 집안 단위로 가장의 일을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다. 집안에서 약국을 차리면, 약국을 운영하는 남자들 곁에서 여자들이 제약 제조를 거들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남편들이 사망하면 집안의 여자들 (아내->딸->손녀)이 사업을 이어서 계속하였다. Daffys Elixir 라는 약품 브랜드도 그 케이스로, Anthony Daffy가 제조하던 물약 레시피가 손녀인 Katherine Daffy에게 넘어갔으며, 그녀의 사업가 기질로 18세기에도 지속적인 홍보로 승승장구를 하였다. 참고로, Daffe's Elixir의 내용물도 아니스 열매 씨앗, 브랜디, 코치닐, 엘레캄판, 회향 씨앗, 할랍, 만나, 파슬리 씨앗, 건포도, 대황, 사프란, 세나, 스페인 감초 등으로 심상치 않았는데, 현대의학으로 해석하면 알코올이 바탕이 된 관장약으로 평가할 수 있다.
18-19 세기에 와서 여성들은 위와 같이 물려받은 사업으로, 남자들과 같은 신문사로 자기가 제조한 약품을 홍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에 만들어질 Society of Apothececaries (제약협회)에 정말 적은 수의 여자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 과부로 앞서 말한 남편의 사업을 물려받았음이 유추가 된다. 당시까지만해도 의술을 행하는 여자들은 그들의 입지만큼 매우 작았으며, 약사라는 직업도 없었기 때문에 의학과 관련된 공식적인 기록에는 여자들의 이름이 없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의술에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의 질책이 배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부터는 영국 역사 속 여자 약사들의 사회적인 권위는 어느나라와 같이 쌓아가고 쟁취해야하는 것이었다. 19세기 1861년도에 처음으로 Elizabeth Garrett라는 여자가 영국의 약학회 약학대학에 입학했다. 이는 기존 런던의 남성주의 의사사회에 반하는 첫 여성의 약대 입학이었다. 당시 시대의 여성들은 재력의 부족과 신분장벽 때문에 의약학과 같은 전문적인 직업에 종사하기 어려웠는데, 아이러니에게도 당시에 팔리는 약품에는 아직까지 집안에서의 보살핌을 하는 여성의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다.
Elizabeth Garrett Anderson은 사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의 여자였지만 사회적인 편견을 뚫고 영국의 첫 내과 및 외과수술의이다. 그녀는 훗날 최초의 여성 의학 교수로서 여성 의과대학인 London School of Medicine for Women을 설립하게 된다.
19 세기 블룸베리 지역의 여자 약사에 관하여
1841년도, 내/외과의들의 권위에 대항하기 위하여 Chemist들과 Druggist들은(이때까지도 약사라는 단어가 없었다) London Phamaceutical Society(런던 약학 협회)를 세웠다. 1년 후인 1842에 협회에 약학, 화학 등의 교육 과목이 개설이 되었으며, 협회 아래에서 남성들은 약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1869년에는 본격적으로 약사를 공식적으로 등록하는 법이 개설되었고, 등록된 여성은 매우 소수였다. 이후에 약사 면허를 위한 시험이 개설되어 해당 자격을 통과한 사람들만이 약사로 등록을 할 수 있었는데, 첫번째로 합격한 여성은 Fanny Elizabeth Potter으로, 약사인 아버지를 둔 집안에서 태어났다. Fanny Potter는 아버지의 약국을 물려받았고, 1930까지 약 60년 동안 약사로서 일을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약사로 등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여자 약사에 대한 외부의 사회적인 시선이 고운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여성들은 언제나 옆에 자신을 위해 일을 같이하며 일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남자가 필요하였다. 이 상황의 판도를 뒤집은 것은 남자인 Robert Hampton이다. 그는 1873년 "Valentine to the Council of the Pharmaceutical Society" 문서로 자신의 와이프인 여성 약사를 위한 권리를 주장하며 제약 협회 이사회에게서 여성들의 강의 수강권을 얻어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협회는 랩실 강의까지는 허가하지 않는 등, 또한 시험을 칠 수 있게 하되 강의 수강을 불가하게끔 제지한 강의들이 남아있는 등 완전한 평등은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1877년도에 Rose Minshull, Louisa Stammwitz, Alice Hart 이라는 세명의 여성 협회 등록 수강생들이 끈질기게 항의를 하여 여성의 랩실 출입이 허용되었다.
약학수업 및 여자 약사의 사회적인 포용에 대한 여성 인권 운동은 계속되어 1879에 결국 남녀 모두 런던 약학 협회의 멤버가 될 수 있었다. 이 운동을 통해 Isabella Skinner Clarke, 그리고 Rose Minshull 두명의 여성이 협회의 첫 여성위원으로 임명되었다. Rose Minshull은 여성 및 어린이 병원에서 결국 Dispenser - 병원에서 전문적으로 약을 조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역할은 제약의 앞선이 아니라 뒷선에서 일을 하는 역할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는 여성에게 매우 적합한 역할로 여겨졌다.
이후 Dispenser - 제약 조제 만을 위한 학문 및 학과가 생겨났고 이는 기존 약대의 50%의 공부량으로 비교적 쉽게 공부할 수 있는 학문이었다. 여성 Dispenser(제조사)가 많이 나오는 이때쯤, 제조사인 여성작가가 쓴 The Guilty Pear(1917)라는 추리소설 등이 발간되었고 이렇게 여성 작가에 의한, 전문 지식을 활용한 문화 1차, 2차 창작물이 많이 생성되기도 하였다.
"The Petticoat Peril": 치맛바람의 위협, 여성 약사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고군분투
1888년도 런던 약학 협회 졸업생인 Lucy Everest Boole은 영국에서 약국을 연구한 최초의 여성 화학자이자 약사였다. 그녀는 졸업 이후 여성 의과대학 - London School of Medicine for Women의 최초의 여성 교수로 부임하여 제약의 학문적 연구를 하게 된 첫 여성이었다. 1894에 Lucy Everest Boole는 Royal Institute of Chemistry 에 첫 임원으로 부임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도 아직 모든 여자들이 이런 전문적인 공부를 할 수 있지는 않았다.
해강 시기의 학문 연구에서는 환영받지 못하였지만, 제약업계에서 여성들은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약 제조 전선에서 여자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대형 제약사 등에서 여성들을 대거 채용했기 때문이다.
이후 전국 여약사 협회 (National Association of Women Pharmacists)가 만들어지고 여성들의 약사의 사회적인 지위를 찾기 위한 여성 약사 등록제도 및 네트워킹 모임이 강화되었다. 1905년, 전국적으로 105명 정도의 등록된 약사가 활동하고 있었을때 쯤, 이런 사회적인 여성 지위 향상을 경계하면서 the petticoat peril (치맛바람의 위협) 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이 시기에는 여자들에 의해 집필된 인권 향상을 위한 서적, 여성 투표권을 요구하는 여성 약사 연합 정치활동, The Malthusian League 기고 활동이 활성화되어, 여성들은 사회 전반의 빈곤 해결 및 건강증진을 위한 강한 주장을 하기도 하는 등 매우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쳐갔다.
여성들의 권리상승은 약대 입학 인원으로 확인을 할 수가 있다. 놀랍게도, 1914년 Bloomsbury School of Pharmacy에 입학한 여자가 3명이었던 것에 반해, 1917년에는 처음으로 여자가 입학한 남자와 같은 비율로 입학을 하였다.
1911년도, 1차 세계대전 쯤 Deane & Co Dispensing Chemists (아직까지 pharmacy가 아니라 chemists라는 단어 사용에 주목하라) 제약회사를 여자 사업가 두명이 (Margaret Buchanan, Agnes Borrowman) 운영하였다. 이 두명의 약사는 이후 Gordon School of Pharmacy for Women을 세워 (현재는 UCL econ department 건물), 여자 입학생 비율이 100%로 여자 약사 사회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1947년, 처음으로 여성 Pharmaceutical Society의 장이 선출되었다. 1960년도 20%의 여자 입학률은 1970년도 70% 로 증가하였고, 퀸 엘리자베스 설립 Brunswick school of pharmacy가 생기고 여자 약사의 비율이 더더욱 늘어나면서 현재는(2024) 약사의 비율이 60% 정도가 된다.
참고로, 2014년에 Dame Sally C Davies 교수가 영국 Department of Health (=보건복지부) 의 첫 여성 Chief Medical Officer로 임명되었다. 선진국에서, 메디컬 소사이어티의 장에 처음으로 여성이 임명된 년도가 2014년이라니, 여성 인권은 정말로 눈을 뜨지 않으면 코베이는 격으로 남성 인권에 비해서 너무나도 아직 가볍다.